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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기 위한 허우적거림[★] by 공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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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시각 추가작성 2009-03-11 (수) 15:06 ------------------------------------ 엠블이 역사속으로 사라짐으로써 어쩔 수 없이 블로그를 이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내 기존 엠블의 정보들이 그나마 덜 손상된 상태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싸이월드 블로그나 이글루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했다. 기존 포털 사이트들의 블로그와 그 유사성에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고 싸이 미니홈피와의 연동이 장점이고 배경음악 등을 사용할 수 있어 싸이 블로그에 조금 흔들리기는 했으나 데이터 보관이라는 나의 블로그 운영 원칙을 생각하며 이 곳에 둥지를 틀었다. 하지만 솔직히 실망이다. 아래 알고 지내는 지인의 블로그에 댓글로 남긴 글을 이곳에 남겨본다. 언제부터인가... 시간에 쫓긴다는 느낌이 강해지면서 내 글이 아닌 퍼온 글로 블로그를 도배하고.. 내 생각을 덧칠하는 글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블록질을 했었드랬소.
저작권과 관련하여 내 블로그는 자유롭지 못하다오. 예전 엠블 공지글에서도 이러한 내 생각을 남겨두었었지만... 나는 카피라이트가 아닌 카피레프트를 지향하오. ( 내가 왼손잡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고... ㅡ,.-a )
열린 공간 인터넷은 계속 되어야 한다는 취지에 공감하기 때문이오. 내 블로그는 공개된 거의 모든 글은 누구든 퍼갈 수 있소. 심하게 불안하다 싶으면 자물쇠 채워두곤 하면서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소.
신문을 보며 스크랩을 하여 보관하는 것을 그 누구도 나무라지 않소. 하지만 인터넷은 그렇지 않소. 나 혼자만 보라는 얘기라 생각하오. 음악 테이프나 CD를 구입하여 무한정 듣는 것 또한 그 누구도 나무라지 않지만, 인터넷은 그렇지 않소. 나 혼자만 들으라는 얘기라 생각하오. 하지만 예를 든 이 두가지는 똑같은 법규정을 적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오. 인터넷일지라도 '음악은 유료이니 돈내고 구입해서 들어라' 라고 말하면서, 신문이나 방송의 기사는 웹상에서 돈내고 구입해서 보라고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나라 인터넷의 현실이오. 퍼갈 수 없게끔 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기사 맨 하단에 무단전재를 금한다는 경고문구로 나같은 누리꾼을 위협하오.
나는 돈내고 신문 기사를 스크랩할 수 있다면 환영할 것이오. 물론 그렇게되면 지금보다 더 적은 양의 기사가 스크랩되겠지만...
아무래도 난 공짜를 좋아하나보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나는 머리숱이 줄어드는 조짐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으니... 공짜를 좋아하면 대머리가 된다는 말은 거짓인 듯 하오...
엠블을 이글루스로 옮긴 후.. 왠지 이러한 펌질이 낯설게 느껴졌소. 이글루스는 어쩐지 그러한 블록질이 부도덕하게 느껴지는 분위기랄까?? 하여.. 요즘에는 되도록 펌질을 하더라도 나의 생각이 어느 정도 포함된 글만을 이글루스에 남기곤 하오.
나는 이러한 블록질이 매우 불편하오. 기존의 엠블보다 훨씬 뒤쳐지는 이글루스의 유저인터페이스도 그러하거니와 자꾸만 기존 엠블과 비교되는 이글루스가 왠지 정이 덜 가는 것이 사실이오. 파일 업로드도 그러하며, 동영상 업로드가 그러하며, HTML편집에서 <BR>태그가 자동으로 먹는 것이 그러하며, 이미지나 동영상을 업로드 하였을 때 디폴트로 가운데 정열되는 것이 또한 내가 이글루스에서 점점 멀어지게 하는 요인들이라 생각하오. 이 외에도 한참을 더 열거할 수 있지만...어차피 이사온 마당에 누워서 침뱉기라 생각하여 이글루스 흉보는 것은 이쯤에서 그만할까 하오..
내가 처해진 상황이 상황인지라.. 지금의 나는 다음 블로그가 편하오. 다음 블로그는 2006.4.11. 첫 글이 있는 것을 보니 그 때 즈음해서 개설한 듯 하오. 엠블이 너무 편했고, 원하는 것 요구하면 모두 들어주었기에 다음은 사용하지 않다시피했는데.. 요즘엔 그 펌질을 다음 블로그에 하고 있소.
나는 이 펌질을 나쁘다고만 생각하지 않소. 살아가면서 원본을 창조해낸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일인지 너무도 뼈저리게 체험했기에... (사진을 찍거나, 아이들 재롱잔치 내지는 거리의 사람들 모습을 담은 동영상이 그나마 원본이라면 원본이라 얘기할 수 있겠지만 이 또한 초상권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오. 또 다른 법에 저촉되는 행위일 수 있다는 얘기) 그저 나와 생각이 같으면 나의 생각을 남기지 않더라도 퍼온 글 하나만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하며 블록질을 하고 있소..
특히나 지난 해 아고라 경방에서의 미네르바를 비롯한 수많은 논객들의 글을 접한 이후로는 이러한 나의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현실인지 아니면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가상의 세계가 진짜 현실인지... 나는 알지 못하오. 메가스터디에서 TCC 동영상 강의를 촬영한 선생들 중 최진기라는 강사가 있소. 나는 그 분을 높게 평가하는 1人이오. 그의 특강중에 [이시대의 교양인을 위한 미술사 특강 (등록일 : 2007-03-19)]이 있소. 그 강의를 접하면 이러한 나의 생각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오. 아래 URL에서 확인할 수 있소. http://blog.daum.net/gongha/13505396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아 확정된 것은 아니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준비했던 것이 올해도 없으면.. 일본으로 넘어갈까 생각하는 중이오. 예전에 함께 일했던 형님이 잠만 재워준다면....ㅎㅎㅎ
가끔 예전 학과 후배가 연락을 해오곤 하오. 얼굴 한번 보자고... 나는 온라인 대학생활이 너무도 힘들었고, 많은 것을 잃어 그 당시 지쳤었고, 그래서 많은 이들과 만나는 커뮤니케이션을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 얘기해주었소. 사실 내가 처한 상황이 더 큰 문제이긴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지인들과의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생긴 나를 발견했소. 자꾸만 나만의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음이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하는 나에게 있어 무척이나 고독한 싸움이 되어버렸소. 하지만 어쩔 수 없소..
미네 할배의 말씀대로 천민이라 할지라도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오.
공주도 즐거운 블록질하시오. 만나지는 못할지라도 전화는 언제나 환영하오. 가끔 낭군이 힘들게 하면 내게 전화하여 한풀이를 해도 좋소...ㅎㅎㅎ
이제 공주가 좋아하는 봄이오. 나도 새로운 하루하루를 맞이하고 싶소. 올봄도 화이팅이오~ 추가작성 2008-05-19 (월) 20:55 ------------------------------------ 오늘 이후로 2mb에 대한 실오라기 같은 희망마저 놓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지난 대선에서 2mb를 찍지 않았다. 지방에서 투표하기 위해 서울까지 올라가 투표한 후 지인들과 술을 마셨다. 개표방송에서 거의 확정이라는 아나운서의 말에 술집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은 희희낙락거리고 있었다. 대선 당일은 우울했고 민주개혁세력의 무능과 노무현의 존재감이 새삼 커보였던 하루였다. 요즘은 뭣도 모르고 경제 CEO였었다며 국가 경제 성장시켜 일자리 만들어줄 줄 알고 2mb를 찍었던 많은 국민들이 원망스럽기 그지 없다. 그러나 앞으로 새로운 희망을 꿈꾸기로 마음먹었다. 2mb의 퇴임만을 기다리며, 제2 의 노무현의 출현을 기대한다. 마음에 드는 연하장이 있어 올려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미지 출처] 한국인터넷 빌링으로부터 도착한 메일 이미지 하단 일부 수정 [원본 이미지]
최초작성 2008/02/01 (금) 01:43 ------------------------------------일부 내용 추가 2008-/04/06 (토) 02:21 엠파스에 요청했던 공지글 쓸 수 있도록 해달라는 저의 요구를 엠파스측에서도 고려하고 있다하더니 드디어 적용되었네요. 무척이나 기다렸는데 반갑네요. 엠파스 감사합니다. 이곳은 지극히 개인적인 저의 기록보존소이자, 이곳을 찾으시는 분들과 저와의 커뮤니케이션 공간이기도 합니다.
대학 전공이 광고와 언론영상, 디지털미디어디자인 쪽인지라 주로 신문이나 방송의 보도를 접하면서 느끼는 점이나 생각을 기록으로 남기며,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수집하며 정리합니다. 주로 디지털, 신문이나 방송, 광고, 영상물 등의 매체, 사진이나 디자인과 관련된 것들에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사회 돌아가는 모습이나 제품에 대한 호기심도 위에서 말한 사항과 맞물려 이곳에 남겨지곤 합니다.
이 곳 공하™가 꿈꾸는 세상에서 보여지는 카테고리의 글들은 거의 대부분 퍼가실 수 있습니다.
이건 있습니다. 스크랩해오는 자료들중 언론사의 기사는 하단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라고 쓰여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러한 기사들을 허락받지 않고 스크랩 해온 것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스크랩을 해가셔서 혹시라도 입게되는 피해에 대한 책임은 스크랩을 해가시는 분의 몫입니다. 스크랩을 해온 기사나 정보를 올린 것에 대한 비난이나 비방 혹은 심할 경우의 법적인 책임까지가 제 자신이 감당해야 할 부분일 뿐, 그 정보가 담긴 글을 2차, 3차 스크랩해가는 것에 대한 책임까지 제가 챙겨드릴 수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위의 말은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라고 쓰여진 정보를 제 임의로 스크랩해 온 저의 행동은 정당하지 않다는 얘기 입니다.
예전에는 이곳 엠파스내에 올라오는 신문기사는 모두 스크랩이 가능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권한도 언론사들이 막아 놓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오프라인 상에서, 신문은 구매하면 대금을 지불합니다. 그리고 그 신문 기사 중에 마음에 드는 기사는 스크랩하여 개인이 보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은 아직까지 제약이 있습니다. 블로그에 언론이나 방송의 정보를 맘대로 저장할 수 없는 것이 그것입니다. 카피라이트(copyright)가 아닌 카피레프트(copyleft)를 지향하는 제 입장에서는 별로 달가운 일이 아니지만 현실이 그러합니다. 그리고 저작권은 인정해줘야 합니다. 그 기사나 보도의 소스를 인터넷에서 취득했다손 치더라도 기사화되었다면 최소한 소스 제공자와 얘기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할테니 말이죠. 요즘은 해당 신문사의 웹사이트에 회원 가입하고 블로그를 개설하면 원하는 기사를 그 블로그에 담을 수 있는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여기저기 그 많은 신문사 인터넷 사이트에 가입하여 하나 하나 블로그 개설하여 관리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방송사나 언론사 웹사이트에 하나 하나 블로그 개설한 후 다시 이곳으로 퍼오는 것은 또 허락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자세히 알아보지 않았습니다. 일정액을 지불하고 필요한 자료를 마음놓고 스크랩해갈 수 있도록 신문협회나 방송협회에서 규정을 정해 실시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합니다. 블로그내 배경음악(mp3) 사용하듯 말입니다. '일년에 얼마' 하고 정해준다거나 스크랩해가는 '기사의 건수'에 따른 가격책정을 생각해볼 수 있겠죠. 하지만 아직 인터넷 환경을 그렇지 못합니다. 이런 저런 핑계대며 불법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앞으로 제 블로그에서 글을 스크랩해가시는 분들은 위에서 언급한 내용을 인지하신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학연, 지연, 종교, 정치적인 얘기까지도 환영합니다. 하지만 해당 없는 글에 댓글로 작성한다면 서로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딴지도 환영합니다. 그러나 반대만을 위한 딴지나 대안없는 딴지는 정중히 사절합니다.
모쪼록 이곳을 다녀가신 분들은 웃고 가셨으면 하는 바람이며, 즐거운 서핑하시고 날마다 행복한 날 맞이 하시길 바랍니다. 프롬.공하™
PDA폰 'PIDION BM-200', 해외채널의 지속적인 호평에이빙뉴스 기사전송 2005-12-19 15:14 
[AVING-KOREA] PDA폰 ''PIDION BM-200''의 인기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산업용PDA 전문기업 Bluebirdsoft (블루버드소프트)가 일반소비자용으로 출시한 ‘PIDION(피디온) BM-200’이 산업용 모델인 ''BM-150'' 못지 않은 다양한 컨버전스 기능으로 해외 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다.
''BM-150''이 통신환경에 맞게 ‘CDMA & WLAN’ 또는 ‘CDMA & GPS’ 중에서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BM-200''역시 PMP, GPS, 2백만화소 카메라를 지원하며 CDMA망을 이용한 PDA폰으로 활용할 수 있어 현재 시장에 출시된 대부분의 IT디바이스의 기능을 한 번에 구현하며 올인원 기기로써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사진설명: ubergizmo는 이 제품의 입력방식에 주목하고 있다. 불필요한 키를 없애고 그 자리를 활용해 LCD창을 크게 확대한 부분에 대해 호평하고 있다) 
(사진설명: Gizmodo는 ''Window CE''는 멋진 OS라고 볼 수 없지만 이 제품의 멋진 컨버전스 기능이 ''Window CE''의 부족한 부분들을 보완해주고 있다고 밝혔다) 

GSM방식의 유럽 시장에는 통신 모듈이빠진 PDA로 출시될 예정이다. |
[출처] http://news.nate.com/view/20051219n04996
다시보는 노무현 대통령이 걸어온 길

1987년 8월 거제 대우조선 파업현장에서 최루탄에 맞아 숨진 노동자 이석규씨의 사체부검과 임금협상을 도와주다 노동법의 대표적 악소조항인 `3자개입' 금지 혐의로 구속된 노무현 변호사. 33이라는 숫자가 선명한 수의와 반성문을 거부한 눈빛이 인상적이네요. 지금껏 공개되지 않은 사진입니다.

1973년 1월 노무현은 유난히 대나무가 많았던 이웃집 처녀 권양숙여사와 결혼했습니다. 사법시험 공부를 하던 중이었죠. 동네 사람들은 권여사를 늘 땅만 보고다닌 수줍음 잘 타던 여자로 기억하네요. 혼례식 장소는 노무현 집 마당. 사모관대^쪽두리^병풍^생닭 위로 길게 늘어진 축문까지. 요즘엔 보기 힘든 전통혼례 장면들이죠. 돈없는 청년 노무현은 신혼여행도 생략하고, 권여사 손에 반지도 못끼워 주고 무현의 집 한방에서 새 살림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권여사의 몸 속에는 장남 건호씨가 자라고 있었다고 하네요.

70년대 후반 노무현이 부산에서 변호사를 하던 시절입니다. 부산에서 다섯손가락에 꼽히던 시절입니다. 군부독재의 대표적 학생운동 탄압이었던 `부림사건'을 겪고 인권변호사로 탈바꿈하기 전 한때 잘 나가던 때죠. 노변은 주말이면 광안리 앞바다에서 요트를 배웠다고 해요. 동아대 동아리들과 어울려 요트를 당겨보고, 밤늦게까지 백사장에서 막걸리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고 기억하네요.

노무현은 어린시절 사진이 거의 없습니다. 후보시절 공개한 소풍갔던 장면이 거의 유일한 유년기 사진이죠. 이 사진은 부산상고 졸업후 곧바로 시골에 와서 사법시험 공부를 할 때 찍은 청년 노무현입니다. 탱탱한 피부가 지금과는 다르죠. 산밑에 공부방을 짓고 청운을 꿈꾸던 시절이지만, 책값이 없어 울산의 막노동판에도 뛰어들던 우울한 시절입니다.

명절때 집뒤 봉화산 자락에 있는 선대 묘소를 찾아 아들 건호씨의 총을 갖고 겨눠보고 있는 사진입니다. 건호씨는 아버지가 자주 하던 말로 {부나 권력을 중시하지도 경멸하지도 말고, 자기답게 사는 것이 아름답다}는 가르침을 맘속에 새기고 더군요.

1965년 여름 부산상고 3학년 때 `8인방'이라고 불린 단짝 친구들과 해운대 백사장에 엎드렸네요. 돈이 없어 대학 진학보다 취업반을 선택했고, 불안한 미래에 대해 방황과 갈등이 많았다고 기억하는 시절입니다. 담배를 처음 입에 물어본 것도 고1때 학교옆 코스모스밭이었다고 하네요.
친구들은 노무현을 의리로 기억합니다. 어렵게 집에서 올라온 향토장학금을 사진 속에 있는 한 어려웠던 친구의 동생 입학금으로 주고 교실바닥에서 자면서 살기도 했습니다. 뒤 쪽으로 40년전의 해운대 전경을 본 것으로도 본전은 뽑는 사진이죠.

노무현이 노란색 유니폼을 입고 있네요. 부산에서 변호사 생활을 할 때 부산상고 교정에서 열린 동문 축구대회에 참석한 것입니다. 지금은 이사갔지만 부산상고가 서면에 있을 때입니다.
친구들이 전하는 노무현의 축구실력은 {기술보다는... 체력이 좋죠} {지치지않고 끈질기게 공을 따라다닌 쪽}이랍니다. 학교 뒤편에서 방과후 작은 고무공을 갖고 놀던 때죠. 노무현은 좋아하는 축구선수로 홍명보, 윤정환, 네덜란드의 요한 크루이프를 꼽았습니다.


누구나 한두장씩 갖고 있는 뺑이 치던 시절입니다. 노무현은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중 1968년 3월 입대했습니다. 23세였죠. 군번 51053545. 원주의 1군사령부 행정병을 거쳐 일등병때 원통에 있는 을지부대(12사단) GP로 배치됐습니다. 수은주가 영하 30도 밑으로 떨어지고, 무장간첩이 침투하던 시절 험한 금봉산 철책을 막던 부대였습니다. 노무현은 날 밤새우는 정보상황병으로 근무했죠. 당시 대대장은 {글 못읽는 까막눈도 많았던 시절이었고, 노무현은 말이 적지만 동료들과 잘 어울렸던 기억입니다. 책을 많이 읽었고 자기 직무는 책임을 다하던 모범 생활을 했다}고 말하네요.
노무현은 39개월만에 만기 제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계급은 상병제대였죠. 월남전에 다녀온 동료들이 무더기로 병장을 달아 병장 진급 여분이 없었다네요. 원통 부대는 노무현이 대통령 당선후 옛 부대를 찾아 내무반과 김장묻던 장소를 기억해 화제가 됐던 곳입니다.
1987년 6월 노무현 변호사는 부산 거리에서 살았습니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던 때죠. 오른쪽 마이크를 잡고 서 있는 사람이 노변입니다. 노변은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합니다. 권여사는 먼훗날 {최루탄 터지는 곳마다 아들 딸 손을 잡고 얼굴한번 보려고 찾아다녔다. 결과적으로 온 가족이 투사가 돼 버린 것}이라며 웃은 적이 있습니다.



1992년 5월 부산 칠성시장 앞에서 `광주항쟁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는 노변호사입니다. 국회의원 재선에 실패하고, 다시 고향에서 활동하던 때입니다.
경찰서장이 그 독종에 혀를 내두른 노무현입니다. 최루탄이 터져도 도망가지 않고 전경들과 혼자 대적해 길바닥에서 버텼기 때문이죠. 아래 사진은 최루탄 파면이 튀어 피를 흘리는 장면입니다. 노무현의 애틋한 투쟁이 먼훗날 대선후보 경선때 광주에서 사랑을 받은 한 배경도 되겠죠.

노무현은 후보시절 아침 5시에 눈을 떴다. 먼저 거실에서 명상과 요가를 했다. 머리가 맑아진다는 요가 예찬론자이다. 권여사는 {맨손체조와 스트레칭을 엮어 남편이 직접 개발안 이상한 동작들도 있다}고 전한다. 노무현은 어려서 지게질도 하고 산도 잘탔던 강골 체질이다. 중학교때 복싱부에 들어갔는데 {힘도 세고 몸도 빠르다}며 선생이 집에 와서 {복싱시키자}고 한 적도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큰 형이 {쌈질밖에 더 하느냐}며 반대했다고 해요.
윗사진 뒤쪽 부엌에 보이는 사람이 권여사입니다. 권여사는 {과식을 않고 음식은 가리지 않는다. 잡곡밥에 된장·미역·북어·사골곰국, 채소로 만든 담백한 나물류와 국물김치를 좋아한다』고 전한다. 정계입문(43세) 후엔 아침에 꼭 밥을 챙겨먹고, 보약도 먹는다. 음료는 녹차를 자주 마신다. 입맛이 없을 때는 삼계탕을 찾는다}고 전하더군요.
노무현의 골프는 해양수산부장관(52세)때 늦게 배웠다. 칠 때가 돼서 쳤고, 핸디 30에 딱 한번 80대에 들어가봤다고 말한다. 노무현의 머리(필드 입문)」를 얹어준 친구 강태룡씨(자동차부품업)가 전한 골프 폼은 자치기 형. 드라이브(180~200야드)가 장타는 아니고, 공을 잘 맞추는 「또박또박」 타법이다. 실수가 적고 게임에 열중한다.
물(워터 해저드)을 넘기기 꺼림찍하면 무리하지않고 돌아가는 스타일』로 그린다. 파워(힘)보다는 세심하고 치밀하게 치는 셈이다. 노무현의 주량은 폭탄주 1~2잔에 소주 반병이다. 18번은 운동권 가요 `타는 목마름으로'와 선거유세때 따라부르다 익혔다는 대중가요 작은연인들(권태수 김세화) , 그리고 `부산갈매기'이다.

후보시절인 2002년 여름 형 건평씨의 회갑연에 모인 양가 가족들. 코엑스 어디였다죠. 뒤쪽 맨 왼쪽이 아들 건호씨, 그 옆이 딸 정연씨입니다. 노대통령은 후보시절 {큰 형이 일찍 죽은 후 작은형은 나의 버팀목이자, 가장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노대통령이 후보시절 노사모 행사때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사진이네요. 이 눈물이 송치복씨가 만든 대선후보 광고 눈물편의 컨셉이 된 것이죠. 이 눈물을 흘리던 초심을 그대로 간직하고, 정정당당한 개혁의 선봉장으로 끝까지 달리길 기대합니다.
노대통령이 후보시절 노사모 행사때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사진이네요. 이 눈물이 송치복씨가 만든 대선후보 광고 `눈물'편의 컨셉이 된 것이죠. 이 눈물을 흘리던 초심을 그대로 간직하고, 정정당당한 개혁의 선봉장으로 끝까지 달리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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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세안+3정상회의 및 유럽3개국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던 노무현대통령이 일정을 바꿔 8일 오전(현지시간) 한국 자이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이라크 아르빌을 전격적으로 방문한 뒤 이동하는 지프차량안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에르빌/탁기형 기자


▲ 국방일보에 특별기고한 노무현 대통령의 '추억의 내무반' 기념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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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minihp.cyworld.com/24405832/230795228
노무현의 기이한 '숫자인연'
* 대전환의 '1'에서 넘어야 할 숫자 '9'까지
군에서 만기제대한 노무현씨까 본격적인 고시 공부에 들어간 것은 1971년부터였다. 그리고 10년후인 1981년, 조세문제와 관련 부산 지역에서 잘나갔던 노무현 변호사는 '부림 사건'이라는 일생 일대의 큰 사건과 맞부딪히면서, 인권변호사로 대변신을 하게 된다.
1990년은 어느새 정치인 스타로 부쩍 큰 노무현 의원이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걸만큼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만 했던 한해였다. 하지만, 그는 '3당 합당' 동참이라는 당시엔 가장 안전하게 보이던 길을 '원칙에 어긋난다'며 거부했다.
그리고 또다시 10여년이 흐른 2002년 겨울, 그는 마침내 대통령 당선자라는 지위에 올랐다. 강산도 몰라보게 변한다는 10년을 주기로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던 셈이다. 1에서부터 9까지 숫자와 관련된 노당선자의 삶을 모아봤다.
'대전환'의 1
노당선자에게 있어 1이라는 숫자는 곧 '전환'과 '성공'을 의미한다. 71년 상고 출신으로 고시 공부를 어렵게 시작한 게 그랬고, 10년 후 '부림 사건'이 그랬다. 1991년엔 통합민주당의 대변인을 맡으며 정치 인생의 꽃을 활짝 피운다는 말까지 들었다. 공교롭게도 권양숙 여사와 결혼한 것도 73년 1월의 일이다.
단 한번도 각종 선거에서 기호 1번을 달지 못했지만, 이 숫자는 끝까지 그를 지켜줬다. 2002년 11월, 노당선자는 국민통합 21의 정몽준 대표와 후보 단일화에 성공함으로써 대선 승리의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이제 노당선자는 '국민통합'이라는 또 다른 '하나되기'를 위해 대전환을 모색중이다.
승리의 상징 2
2002년은 노당선자가 거의 일년 내내 승리를 표시하는 브이를 그리며 국민들의 지지를 호소했던 시기였다. 당내 '정풍운동'의 산실인 국민경선에서 기호 2번을 달고 나온 그는 광주를 거치며 '노풍'을 타고 마침내 후보로 결정됐다.
그리고, 연말 대선에서도 그는 기호 2번을 달고 나와 오랜 기간 '대세론'을 앞세운 상대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 당선자가 됐다. 2를 앞세운 6월 지방선거에선 참패를 겪기도 했지만, 이 역시 대선 승리의 요인으로 꼽는 분석가도 적지 않다.
한편, 부인 권양숙 여사와의 사이에 자녀 둘을 둔 가장이기도 한 노당선자는 취임 전에 둘 모두를 '해치우겠다'(결혼시키겠다는 의미)고 말했다.
고뇌의 숫자 3
노당선자에게 있어 3이라는 숫자는 '고뇌'와 가깝다. 그는 1990년 3당 합당을 거부하며, 엄청난 고민에 빠졌었다고 뒷날 술회했다. 함께 하기로 했던 정치인들이 속속 민자당으로 발길을 돌릴 때엔 심한 회의감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국민들 뇌리속에 오랫동안 남은 이 장면은 뒷날 그의 가장 큰 재산이 됐다.
정치인으로서는 드문, 국민들에게 달걀을 맞는 경험도 노당선자는 3번이나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정치적 이유로 부산역앞에서 맞았으며, 나머지는 노동자와 농민들에게였다.
그가 성공한 대통령이 되느냐의 여부는 이 세가지를 어떻게 충족키셔주느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당선자는 이 사건들과 관련, "계란을 맞고 나면 그 문제가 잘 풀리더라"고 말했지만, 정권 내에도 이어질지는 두고 볼 일이다.
한편, 막판 돌출 변수가 없지 않았지만 노당선자가 정치적으로 민주당과 국민통합 21, 개혁국민정당 등 3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왔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패배의 숫자 4
대선 전까지 그는 6번 출마한 선거에서 4번이나 낙선한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한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노당선자의 지지자들은 당선 보장의 유혹을 버리고 지역감정 타파를 위해 고향에 몸을 던진 그의 과거를 높이 평가한다.
88년 정치권에 들어온 이후 상당한 정치적 인지도를 갖던 그였지만 92년 14대 총선(부산), 95년 부산시장 선거, 96년 15대 총선(서울)에서 연이어 물을 먹었다. 98년 종로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됨으로써 겨우 힘을 차리는 가 했지만,
2000년 16대 총선(부산)에서 또다시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하지만, 승률 30%대를 조금 넘었던 그의 정치적 이력은 가장 크고 중요한 무대에서 빛을 발했다.
동전의 양면 5
노 당선자는 1946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아버지 노판석씨와 어머니 이순례씨의 3남2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다른 정치인에 비해 정제되지 못한 표현과 불안정한 이미지로 곤욕을 겪는 것에 대해 이런 점을 지적하는 이들도 한 때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이미지를 오히려 장점으로 승화시켰고, 5공청문회 스타를 거쳐 뒷날 국민들의 '정치 개혁' 열망과 부합시키는 데 성공했다. 노당선자는 대선에 임해서도 자신이 50대 임을 부각시켜, 이회창 전후보와의 차별성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희망을 주는 숫자 6
노당선자는 지난 2001년 <노무현이 만난 링컨>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남북전쟁을 통해 노예해방을 이뤘을 뿐만 아니라, 화해와 통합을 위한 확고한 철학을 가졌다는 게 링컨에 대한 그의 평가였다.
아마도 그는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을 통해 16대 대선을 준비중인 자신의 각오를 다졌던 것 같다. 지난해 6월 전국을 붉게 만들었던 월드컵 응원 인파의 열기와 에너지도 대선 승리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줬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노풍'이 한창이던 때, 몇몇 여론조사에서 나타났던 지지율 60%가 과연 임기 말에도 기록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도전을 의미하는 7
상고 출신으로 혼자 독학의 길을 걸은 노당선자는 30세인 1975년 제 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함으로써, 자신을 믿고 뒷받침해준 가족들의 노고와 은혜에 대해 빚을 갚았다. 그리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공인으로서의 삶이 시작됐다.
하지만, 합격 이후에도 그의 역정은 순탄치 않았다. 노당선자는 사법고시 합격이후 판사에 임용된 뒤 '따분하다'는 이유로 7개월만에 그만두고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만약 판사의 길을 계속 걸었더라면 지금의 노당선자는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당시의 어려움은 훗날을 준비하는 운명적이었던 것이다.
1987년도 노당선자에게 있어 잊을 수 없는 한해였다. 전국에 걸쳐 대규모 민주화 항쟁이 불길처럼 솟던 이 해, 그는 부산에서 항쟁을 주도하면서부터 전국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같은 해 9월,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씨의 사인 규명작업에 나섰다가 3자 개입과 장례식 방해 혐의로 구속된 사실이 일부 신문에 대서특필된 게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이제 그는 매년 경제성장률 7% 달성이라는 더욱 어려운 도전에 나서야 한다.
'바보 대통령' 8
음력 8월생인 그는 한 때 "장인 때문에 대통령감이 안 된다고 한다면 경선을 그만두겠다. 대통령 된다고 아내를 버리면 용서하겠나"고 말할 정도로 일면 팔불출의 면모를 갖고 있기도 하다.
1978년 변호사를 개업한 일이나, 1988년 당시 부산의 최강자로 뽑혔던 민정당 허삼수 의원을 상대로 정치권에 입문한 것도 무모한 일면이 없지 않다.
지역감정이 극심하던 시절, YS와 DJ 양김에 대항했으며 틈만 나면 '부산'으로 내려가 낙선의 아픔을 맛본 것도 지지자들이 그를 '바보'라고 부르는 이유다. 하지만, 그는 결국 '바보 대통령'이라는 말을 들으며 청와대 입성을 준비하고 있다.
넘어야 할 숫자 9
그의 정치 역정은 우리 정치사에서 '정치 9단'이라고 불리는 양김과 떼놓고 말할 수 없다.
우선 그는 김영삼 전대통령의 권유로 정치권에 입문했다. 그리고 3당 합당 과정에서 YS에게 공개적으로 반발한 몇 안되는 정치인이었다.
92년 대선에선 김대중 당시 후보 진영에서 힘을 모았지만, 이후 정계 복귀를 한 DJ의 국민회의 창당땐 합류를 거부했다. 97년 대선을 앞두고는 '선 정권교체'와 '동서통합'을 명분으로 국민회의를 택했다.
하지만, 대선 후보로 결정된 올 한해에도 양김의 영향력에서 여전히 헤어나지 못했다. 후보가 된 후 YS를 찾아갔다가 오히려 '역풍'을 만나 지지율이 하락했고, DJ의 친친척 비리 연루는 지방선거와 재보궐 선거의 결정적 패인이 됐다.
노당선자는 "DJ 정부에서 계승할 것은 계승하고 개혁할 것은 개혁하겠다"고 말했다. 현실 가능성이 중요하겠지만, 이에 대해선 거의 이견이 없다.
그리고, 국민은 여기에 "3김으로 대표되는 구시대 정치 행태를 완전히 청산하라"는 또 다른 한가지를 주문하고 있다. 그가 이를 성사시킬 때만이 우리 정치권에서 '정치 9단'이라는 말이 비로소 사라질 것이다. <김승현 기자>
<030106> - 민주신문
[출처] http://blog.naver.com/okkdoll/60015259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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